합리성의 오류, 사유와 이해

사유와 이해가 어렵다면 간지 단지 시간을 가져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설령 의미 없는 시간일지라도 적당함을 합리성으로 착각하는 것보다 적어도 손해보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합리성의 오류, 사유와 이해

합리성의 오류, 적당함

 
지식과 정보, 효율성과 경제성, 형태와 디자인, 부동산과 상품 등에 대한 생각들은 합리적인 집 짓기를 위한 기본적인 요소들이다.
이러한 요소들에 대한 합리성을 획득할 수 있다면 행복한 집 짓기가 될 수 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현실 속의 집 짓기는 마냥 행복할 수 없으며 많은 고민의 연속이며 결과는 종종 참담하기까지 하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합리성이란 사실 적당히 싸고 적당히 좋은 집을 짓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직접 머리 싸매고 각종 지식과 정보로 무장하고자 하는 이유 역시 적당히 싸고 적당히 좋은 집을 짓기 위함이며 지식과 정보의 최종 종착지는 평당 건축비와 예쁜 집으로 귀결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짙은 합리성의 그림자는 전문가도 쉽게 생각하지 않는 집 짓기의 모든 내용을 검색창과 유튜브를 통해 어렵지 않게 통달할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을 심어주기도 한다.
합리적인 집 짓기는 어렵지 않게 실현될 것 같지만 왠지 모를 불안함과 허전함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소위 인문학이란 바다에서 마음을 달래보기도 하지만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성경과 같은 절대적인 믿음을 찾고자 하지만 대부분 부유하는 표상일 뿐 인문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마음의 위안 정도일 것이다.
 
건축주와의 상담 혹은 집 짓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판단의 기준 대부분은 사실 합리성이 아닌 적당함이다. 적당한 범주라고 생각되면 굳이 어렵게 합리성을 크리티컬하게 따져 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적당히 싸고 적당히 좋은 집이란 설정 자체가 오류이다.
쉽지 않은 합리성이란 대상을 적당함으로 위로받고자 하는 것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평당 건축비는 적당한 건축비라는 의미일 수 있으며 예쁜 집은 지극히 주관적인 적당함일 수 있는 것이다.
집 짓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난감한 상황 대부분 합리성으로 위장한 적당함 때문에 발생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사실 전문적인 영역인 설계와 시공의 분야에서도 이러한 적당함에 의해 발생하는 난감한 상황이 적지 않다. 건축물의 하자 역시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적당함에 의해 발생하고 있다.
믿음과 신뢰라는 구호 역시 마찬가지이다. 믿음과 신뢰, 최선 등의 행위가 합리성과 직접적 연관이 있다는 개연성은 사실 막연한 추측일 뿐이다.
 
네즈 미술관 정원
네즈 미술관 정원
 
집의 성능과 품질의 문제를 포함해서 의사 결정 하나까지 모두 합리성을 갖춘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설계가 마무리될 즈음 2~3개의 시공사로부터 비교 견적을 받게 된다.
빼곡한 내역서 하나하나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힘들지만, 통상 적당한 비교 과정을 통해 적절한 조언을 통해 시공사를 선정하는 것이 집 짓기의 일반적인 과정이다.
엄밀하게 내역서 하나하나의 의미를 합리적으로 해석, 판단할 수 있는 설계사무소도 드문 것이 현실이며, 시공사의 내역서와 견적서 자체가 시공사의 합리성을 직접적으로 설명해 주는 대목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다시 말해 일반적인 시공사 선정 과정에서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방식 그 어디에도 합리성을 찾아볼 수 없다는 의미이다. 또한 2~3개의 시공사 견적이 비슷하다고 해도 산수적으로 3/10일지 모르지만, 수학적으로 3/100 확률일 수도 있는 문제이다.
 
대중은 정상적이고도 특이한 건축을 요구*하기 마련이라는 설명 역시 일종의 합리성의 오류와 유사하다. 유의할 점은 합리성과 합리성의 오류인 적당함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합리성은 필요한 명분이며 추구해야 할 가치임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만능 치트 키가 될 수 없음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 사유와 이해

 
집 짓기에서 범하는 오류 중 하나는 행위 자체에 너무 몰두하고자 하는 경향 속에서 발생한다.
기초는 어떻게 하고 단열재는 어떤 제품을 쓰며 외장재는 어떤 재료로 하며 평당 공사비는 얼마이며 하자 보수 조건은 어떻게 되느냐 등의 이야기들은 집 짓기의 주된 관심이다.
 
물론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이야기들이지만 때에 따라 집짓기의 궁극적인 의미를 오히려 퇴색시켜 버릴 수도 있다.
하우징 업체와 건축설계사무소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이런저런 조건을 따져보고자 하는 행위는 합리적일 수도 있지만 전혀 합리적이지 못할 수도 있다. 마케팅 광고 문구와 여러 커뮤니티를 들락거리며 수많은 정보를 업데이트하며 비교해 보는 행위 역시 마찬가지이다.
틀린 방법은 아니겠지만 합리성의 극단적 추종은 자칫 집 짓기의 총체성을 간과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양양 부띠크 빌라 비온후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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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성을 추종해 가보면 자연스럽게 사실관계에 관한 판단의 문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과정이 기술과 과학적 방법을 통해 객관적인 사실관계를 따져보는 건축 물리학적 관점이라면 충분히 합리적일 수 있지만, 광고 문구와 계약 조건을 따져보는 과정이라면 조금 더 신중하게 시간을 갖는 것이 유용할지 모른다.
사색의 시간이 필요한 이유는 객관적 사실관계에 입각한 균형적인 판단을 위함이며, 대상에 대한 오롯한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작은 오두막을 짓든 마당과 정원이 있는 집을 짓든 구체적인 삶에 관한 생각의 시간은 집의 고유한 분위기를 결정하는 근간으로 작용하게 마련이다.
거주함에 대한 사유와 이해의 과정은 집의 물리적, 형이상학적인 속성 모두를 포함한 사유와 이해의 과정이어야 한다. 집, 집 짓기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구체적인 삶의 실현, 행복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유와 이해의 시간은 합리성의 오류에 대해 객관적 검증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또한 사유와 이해의 시간을 통해 집짓기에 있어 만유인력 법칙 못지않은 위대한 발견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며, 카프라처럼 깨달음의 힌트를 얻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이론 물리학자 카프라는 해변에 앉아 파도가 일렁이는 것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 춤이라는 것을 깨닫고 <The Tao of Physics>를 집필하게 되었다고 한다.
삶과 소소한 집에 대한 가치를 발견할 수도 있을지 모르며, 작은 인식의 변화도 가져올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양양 부띠크 빌라 비온후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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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의외로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비가 내리는 날에도 비를 맞지 않는 테라스가 있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 어릴 적 부모님과 종종 방문했던 외갓집 시골 풍경도 좋고, 꼭 집이 아니라도 인상적이었던 공간이나 장소에 대한 간략한 묘사도 좋다.
선호하는 가구 스타일과 구체적인 사용 패턴에 관한 생각도 좋고, 조금 생소하지만, 반려묘를 위해 문에 작은 구멍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좋다.
겨울철 화장실 문을 열면 느껴지는 한랭한 느낌이 싫다는 것도 좋고, 실내 화분에 일일이 물 주고 관리하기 힘들므로 아예 화단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도 좋다.
지금은 아이들이 어려서 상관없지만, 아이들의 성장과 더불어 필요에 따라 적절한 기능을 고려할 수 있는 가변적인 공간에 대한 요구도 한 번쯤 해 봄 직한 생각이다.
집의 생애주기와 관련된 비용 계획 등과 같이 논리적인 생각들도 집에 대한 가치를 발견하는 중요한 생각 중 하나일 것이다.
 
사유와 이해가 어렵다면 간지 단지 시간을 가져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설령 의미 없는 시간일지라도 적당함을 합리성으로 착각하는 것보다 적어도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노베르그 슐츠 저, 정영수 역, 『건축론』, 세진사, 1999, p.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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