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의적, 제의화된 이성
집 짓기 과정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잘못된 판단에 의한 잘못된 결과일 것이다.
저마다의 경험과 이성적 판단에 의한 합리적 결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성적 판단이 완전 무결점한 판단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또한 개인의 판단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전문가의 조력을 받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하지만 전문가들의 판단 역시 반드시 합리적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이유는 판단의 기준으로 작동하는 소위 이성의 속성이 대체로 자의적이고 임의적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례로 ‘집은 숨을 쉬어야 좋은 집’이라는 명제는 전혀 사실과 다르며 그 어떤 합리적, 이성적 속성을 찾아볼 수 없는 자의적이며 임의적인 지식에 불과하다.
알고 보면 이러한 자의적 해석은 우리의 일상 곳곳에 광범위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집 짓기 과정에서 발생하고 있는 불편한 상황들은 대부분 이러한 자의성의 문제들이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샘(Fountain)>이란 작품은 보는 그대로 소변기 그 자체이다. R. MUTT란 서명조차 이 변기를 만든 욕실용품 제조업자의 이름일 뿐이다.
다다이즘이니 하는 복잡한 설명은 생략하고 공장에서 만들어진 소변기가 예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자의적 이성 덕분이다. 현대 예술은 뒤샹의 소변기로부터 자의성에 대한 타당한 의미를 부여받은 후 숭고한 이성의 가치와 더불어 무한한 확장이 가능했다. 우리가 미술관에서 감당해야 하는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현대 예술 대부분은 뒤샹의 소변기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사회는 기술과 자본을 통해 물질적 풍요와 더불어 새로운 문명적 발전이 가능했고,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한 인간의 이성은 절대성을 공고히 하며 제의화에 이르고 있다.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숨 쉬는 집이 좋은 집’이란 말은 일종의 제의화된 이성의 반증이라 할 수 있다.
덕분에 6개월 동안 지어야 하는 집 짓기를 3개월 안에 해치우며 사실관계보다는 관행과 자의적인 기준에 더 의존하고 있으며, 평당 건축비와 같은 정량적 가치를 합리적 기준이라고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걱정스러운 점은 건축가들조차 집 짓기의 갖가지 사안에 대한 판단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며 다양한 관점이라고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지극히 자의적인 경우도 없지 않다.
예술이야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집 짓기와 같은 건축이 자의적인 대상이 되는 순간 집 짓기는 갖가지 혼란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건축이 예술인가 예술이 아닌가 하는 논쟁은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분명한 점은 건축은 예술적 속성만으로 존립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집 짓기와 건축은 이성의 자의성이 아닌 기술과 과학, 산업을 숙주 삼아 발전할 수 있어야 한다.
중세 고딕 성당을 스콜라철학의 신학적 사고체계와 신에 대한 인간의 경외감을 빛이란 언어로 인류가 창조한 가장 숭고한 건축물로 해석하는 건축사의 일반론 역시 자의성의 엿보이는 대목이다.
엄밀하게 서양 중심의 프레임이며 서양 건축사에 한정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인류가 창조한 가장 숭고한 건축물이란 견해는 분명 지극히 자의적인 해석이 아닐 수 없다.
비행기로 5시간 거리에 비슷한 시기인 12세기에 축조된 앙코르와트 사원만 보더라도 고딕 성당이 가장 숭고한 건축물이란 해석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무엇보다 경외감이니 빛이니 하는 개념 자체가 지극히 자의적인 개념이다.
조적 구조를 근간으로 하는 고딕 성당은 조적조 자체가 개방감 있는 오프닝이 어려운 구조인 만큼 채광이란 요소가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건축물의 구조적 속성에 따른 특성을 빛과 신, 경외감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다분히 자의성이 투영된 해석이자 이데올로기적 수사일 수 있다.
오히려 수로를 통해 수십 km 떨어진 채석장에서 석재를 옮겨와 물의 압력으로 지반을 개량한 후 석재를 조각하듯 정교하게 사용한 앙코르와트가 훨씬 더 경이롭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감탄해 마지않는 중세 고딕 성당은 고대 로마 시대 콜로세움을 건설할 수 있었던 기술의 축적 속에 이루어진 결과물로 해석해야 한다.
로마 시대 콜로세움의 높이는 42.36m이고 중세 고딕 성당중 가장 높은 성당이었던 아미앵 대성당의 높이는 42.3m이다. 고딕 성당에 적용된 아치, 볼트 등의 구조 기술은 분명 독창적인 요소들도 있지만 이러한 구조적 기술 역시 로마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기술의 축적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콜로세움의 단면 형상은 고딕 성당의 단면 형상을 반으로 나눈 형상과 구조적 개념의 유사점을 고려한다면, 고딕 성당의 축조 기술을 독보적 관점으로 평가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이지 않을 수 없다.
더불어 아미앵 성당 및 중세 전성기 고딕 성당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집필 이전에 대부분 완공되었음을 참작한다면 스콜라 철학과 고딕 성당과의 밀접한 관계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가치 이하일 수도 있다.
스콜라 철학은 내용적인 측면에서 분명 신학적인 내용이지만, 사유 방법에 있어 이전 중세와 달리 고대 그리스적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부분이 상당 부분 차용하고 있음을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의 미는 한(恨)의 미학이며 한옥의 처마 선이 버선코와 닮았다거나 한옥은 가장 자연 친화적인 건축 미학의 결정체라는 등의 관점 역시 다분히 자의적인 해석이다.
한 번쯤 들어보았을 듯한 비움의 가치를 설파하는 빈자의 미학이니 없음의 미학이니 하는 개념 역시 뒤샹의 <샘>이 예술이 되는 순간과 다름없는 자의적인 선언 수준으로 일종의 스토리텔링으로 보아야 한다.
베르그송은 ‘없다’라는 것, ‘비어 있음’이라는 것은 우리 자신의 주관성에 의해 무시된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일 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부분은 우주 어디에도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실재는 빈 간격에 의해 나누어질 수 없는 불가분한 연속적 전체인 것이다.*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고 있는 이성은 거침이 없다.
때에 따라 사실관계를 왜곡하거나 부정하기도 하며 때에 따라 선악의 구별조차 모호하게 만들기도 하며 정당하지 못한 일들에 대해 아이러니한 당위성을 역설해 주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자의성은 인간의 위대한 행위인 예술의 원천적인 원동력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우리가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예술은 이미 현대사회에서 존재하지 않으며 문화라는 블랙홀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전 일이다. 이성이란 명분으로 거침없는 공고한 가치 체계를 만들기 시작하는 순간 예술의 종언은 예견된 일이다.
집 짓기, 건축 행위와 관계된 수많은 사건과 현상 역시 이러한 맥락과 크게 다르지 않다.
⬛ 이해의 사다리
종종 어떤 자재를 어떻게 썼으며, 이 집은 팔 집이 아니라 평생 살 집이다 등과 같은 집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건축주를 만나게 되는 일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부심 충만한 집 대부분의 객관적 사실 관계는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은 대부분이다.
프린시스 베이컨은 1620년 <Novum Organum(신기관(新機關))>에서 인간은 어떤 의견을 채택하고 나면 그 의견을 지켜내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동원하며, 다른 의견이 더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많은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증거를 무시, 경멸하며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고 언급한다.
이러한 ‘우상(idola)론’과 더불어 한쪽으로 치우쳐 있음을 의미하는 ‘편향(偏向, bias)’이란 개념이 있다. 정치적, 종교적 편향이 대표적이지만, 확증 편향, 집단 편향, 우월성 편향, 기준점 편향, 생존자 편향 등 사회, 문화, 기술 전반에서 발생하는 광범위한 인지적 함정이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객관적 사실일 것 같은 지식과 정보, AI 알고리즘에서조차 이러한 편향성은 발견된다고 한다.
모던하우스가 어떻고 북유럽 디자인이 어떠하며 시공사 선정은 어떻게 하며 적정 평당 공사비는 어떻고 패시브하우스가 어떤지 등에 대해 자의적 판단과 기준, 편향적 인식들은 일련의 집 짓기 과정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우상과 편향에 대한 맹신은 대상에 대한 온전하고 객관적 이해를 불가능하게 하며, 혁신과 다양한 가능성을 무력화하는 원인일 수밖에 없다.
합리적인 집 짓기는 자부심이나 자의적 판단이 아닌 대상에 대한 이해의 문제이며, 사람과 사물, 현상과 관계성에 대한 이해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자연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어느 순간 너무나 평화로울 만큼 체계적인 질서를 갖추고 있다. 자연이 무질서하게 보이는 것과 평화롭다고 느끼는 것은 자연의 속성과 전혀 무관한 우리의 감정일 뿐이다.
자연은 고유한 물리적 속성에 따라 존재하는 이해의 대상이지 자의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또한, 소위 이성적 판단은 합리적일 수도 있지만, 이 또한 맹신일 수 있으며, 수많은 우상과 왜곡, 편향을 증폭시킬 수도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알고 보면 우리의 인식 대부분은 대상의 고유성과 무관하게 자의적 이성에 의한 것들이며 이러한 이성의 자의성은 대상의 궁극적인 실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신화는 그 표상 체계가 상징과 은유로 가득 찬 이유로 인해 다소 비과학적이고 종교적이며 때론 추상적인 대상으로 간주하지만, 사실 인식의 문제일 뿐이다. 풍수지리의 은유적 표상 체계 역시 미신, 주술로 치부될 수 있지만 나름 지구 과학, 환경 공학, 건축 물리학적 등의 가치들이 숨겨져 있는 대상이다.
신화가 자의적 대상으로 전락한 순간은 예술이란 자의성에 의해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거나 문학적 연구 대상이 되는 순간이었으며, 풍수지리가 미신이 되는 순간은 정치적 목적으로 의식화되고 제의화 되는 순간이었다.
배트맨과 조커를 선과 악의 대표성으로 규정하는 것은 왜곡된 편향일 수 있는 문제이며, 괴기하기 짝이 없는 베이컨의 작품 역시 자의적인 해석을 유보해야 할지도 모른다.
대상에 대한 이해의 문제가 중요한 것은 대상의 객관적 사실 관계와 같은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자의적, 제의화된 이성의 문제 역시 대상에 대한 이해라는 의미를 재정립하기 위함이다.
더불어 삶과 현실, 집과 건축에 대한 이해와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와 태도가 중요하다. 여기서 이해라는 것은 추상화, 개념화되어 있는 인식이나 정보, 지식 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와 방법에 따라 결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발현될 수 있다.
‘사랑은 서로에 대한 완전한 이해’라는 어느 스님의 법문을 반추해 보면 안 그래도 어려운 사랑인데 거기에다 ‘완전한 이해’까지 필요로 한다니 사랑은 알면 알수록 더욱 막막한 대상이다.
만약 사랑의 개념이 서로에 대한 ‘완전한 이해’라고 한다면 우린 어쩜 더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완전한 이해’는 해탈의 경지이므로 현실에서 사랑은 결국 없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이처럼 어떤 현상과 사물 자체를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며 때에 따라 불가능에 가까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통해 올바른 가치와 새로운 가능성을 인지할 수도 있으며, 설령 그것이 불가능한 대상이라도 해도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노력의 부산물은 반드시 헛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자기야 사랑해’라는 말은 자기를 사랑하고자 노력한다는 의미와 의지의 표현이며, 이러한 노력과 의지의 표현을 통해 비록 완전한 사랑은 아닐지라도 소소한 사랑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노력과 의지에도 불구하고 혼돈의 시간을 마주할 수도 있다. ‘우리 자기야’의 마음과 행동을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집과 건축에 대한 이해 역시 생각만큼 그렇게 쉬운 대상은 아니다.
어떤 대상을 이해하고자 할 때 불규칙성을 특성으로 하는 현상의 관계성을 인지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불규칙성은 상징과 은유로 표상하는 것보다 수학적 함수나 공식으로 추상화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자기야'의 마음을 함수나 공식으로 추상화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평당 공사비와 견적서만으로 집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집이란 대상은 집과 관계된 다양한 현상 및 관계성 등을 함께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현상이란 사람, 사회, 기술, 환경, 미학 등의 요소들이 다양하고 복합적인 관계성을 통해 융합된 특성을 의미한다.
이해의 방법론 중 하나로 유진 라스킨(Eugene Raskin)의 ‘추상 사다리’라는 개념이 있다.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행복 > 사랑 > 여성 > 애인 > 에텔’이란 사다리와 ‘행복 > 재미 > 스포츠 > 낚시 > 물고기’라는 사다리가 있다고 가정한다.
여기서 ‘행복’은 추상적인 대상에 해당하고 ‘에텔’과 ‘물고기’는 구체적인 대상에 해당한다. 행복이란 층위의 대상은 같은 개념이지만 에텔, 물고기라는 층위의 대상은 전혀 다른 대상이 되어버린다.
이처럼 ‘행복 > 집 짓기 > 좋은 집 > 합리적인 집 > 평당 건축비’라는 사다리를 만들었다면 대부분 평당 건축비에 관한 관심으로 광활한 인터넷의 바닷속에서 밤을 새울 확률이 높다. 하지만 ‘행복 > 집짓기 > 가족 > 마당 있는 집 > 중정 주택’이라는 사다리를 만들었다면 마당과 정원이 있는 중정 주택 사례를 찾아보는 흐뭇한 시간을 가질 확률이 높을 것이다.
유진 라스킨는 건축이란 추상 개념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적용하면 감동이 된다고 한다.
다소 막연하고 다소 추상적일 것 같은 집에 관한 여러 생각은 결국 어떻게 ‘이해의 사다리’를 만드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왜 집을 짓고 사는가? 혹은 좋은 집은 무엇인가? 등의 집에 대한 추상은 삶에 대한 일상적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어떤 마음가짐을 갖는지에 따라 결과는 ‘감동’과 ‘평당 건축비’라는 전혀 다른 문제로 귀결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동안 집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깊이 있게 생각해 본 적이 많지 않다.
그동안의 집 짓기는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다소 결핍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시대적 조류에 편승한 주거 양식이었고 어쩌다 보니 아파트란 삶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렸으며 어쩌다 보니 단독 주택이란 열풍 속에서 막연한 동경이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삶과 집에 대한 일상적 가치의 소중함을 이해할 수 있을 때 행복할 수 있다.
* 베르그송 저, 김재희 역, 『물질과 기억』, 살림, 2012, p.7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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