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오래된 미래 

오래된 것들로부터 전해져 오는 기억의 감각을 현대화된 도면 작성 방법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기억, 오래된 미래 

전혀 다른 인식체계

 
오래된 것들로부터 전달되어 오는 알 수 없는 감각의 흔적이 있다.
무속 신앙에 대한 불신 때문인지 우리에겐 이러한 오래된 것들의 흔적에 대해 다소 미신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오래된 것들의 흔적은 막연하거나 낯설게 느껴지지 않으며, 오히려 적지 않은 마음의 안온함을 가져다주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감각들은 DNA와 같은 압축 파일로 우리의 신체 속에 각인되어 있다.
 
절두산순교성지
절두산순교성지
 
옛 건축물의 디테일과 마을의 풍경 등에서 느껴지는 친근한 감각을 일종의 기억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조금 의역해 보자면 기억은 과거와 현재, 미래는 지속적 흐름이란 관점에서 연속적인 대상이다.
창덕궁 비원의 풍경, 어느 한적한 한옥 마을 등에서 느낄 수 있는 친숙함은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았지만, 신체 속에 새겨진 기억의 흔적이다.
기억은 추억과 달리 어떤 개념이나 의식화된 사상과 같은 관념적인 대상이 아니라, 신체를 매개로 한 감각의 지속적 흐름이다. 자연에 대한 근원을 알 수 없는 감정 역시 일종의 오래된 것들에 대한 지속된 기억일 수 있다.
 
과거의 표현 체계라고 해서 현대의 표현 체계보다 과학적이지 못하거나 실용성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19세기에 작성된 대동여지도, 산경표의 표현 체계는 현대의 과학기술로 만들어진 지형도보다 훨씬 사실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정량적인 수치 체계와 달리 산과 산맥, 하천과 강의 관계를 전체적인 관점에서 유용하고 실효성 있게 표현한 체계이다.
물론 오래된 것들을 통해 지각되는 감각 체계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다양한 의미들이 함축적인 표상 체계로, 지속적으로 실존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일련의 이러한 것들을 총칭해서 기억된다고 할 수 있다.
수치 지형도 속에서 산맥과 수계는 개념화된 공간으로 인식되지만, 산경표라는 체계 속에서 산줄기와 물줄기는 구체적인 의미들로 오랫동안 기억되고 지속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어떤 과학 이론처럼 과거와 현재, 미래는 지속이란 차원에서 하나의 연속선상에 있는 동일한 전체일 수도 있다. 과거가 미래일 수 있고, 미래가 과거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옛 건축을 뒤돌아보고 역사와 더불어 그 시대의 문화적 소산을 공부하는 이유는 역사적 교훈을 얻고자 하는 이유 이외에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연속적인 동일한 전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화 <인터스텔라>처럼 과거와 미래는 불과 거실의 책꽂이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인 오래된 미래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3차원 공간은 다차원 중 하나의 차원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 영화적 상상력의 배경이다.
 
 
현대 건축 역시 철저하게 3차원 공간을 전제로 성립하고 있지만 우리에겐 전혀 다른 오래된 인식 체계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
건축가들에게 소쇄원을 도면으로 표현하라고 하면, 분명 배치, 평면, 입면, 단면과 같은 형태로 소쇄원을 표현할 것이다. 하지만 1775년 4월에 제작된 소쇄원 목판본에서 소쇄원은 전혀 다른 표현 체계로 기록되고 있다. 현대 건축가들의 사유 체계와 전혀 다른 공간에 대한 관점이다.
 
건축가들에 의해 작성되는 설계 도면이란 표현 체계는 이성과 과학이 발견한 3차원 공간을 근간한 전문적인 표현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전문가가 아니면 설계 도면이란 표상 체계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전문가조차 경험과 역량에 따라 해석과 이해의 많은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요선정
요선정
notion image
 
일례로 전통적인 관점에서 계획된 조경 설계에 대한 내용을 3차원적 관점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서구 중심의 현대 조경 계획은 대체로 평면상의 기하학적 도상을 기반으로 표현하고자 하지만, 소쇄원과 같은 정원을 이러한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막막한 상황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소쇄원은 3차원적 관점에서 만들어진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쇄원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건축 공간과 장소 대부분 역시 현대의 건축가들이 사용하는 방법과 전혀 다른 인식 체계를 통해 만들어졌다. 독락당, 항단과 같은 공간과 장소를 설계 도면과 같은 현대적 방법으로 흉내 낼 수는 있겠지만, 구체적인 의도와 내용을 심도 깊게 표현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물량과 단가 중심의 조경 계획 방법론으로 소쇄원과 같은 정원을 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주택 조경 역시 건물 배치도 몇 군데에 식재를 의미하는 라이브러리와 수종과 규격을 명기한다고 해서 추구하고자 하는 공간의 구체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원주 단독주택 영원재
원주 단독주택 영원재
 
 
참고할 점은 설계 도면은 대상에 대한 특정 관점의 기술적 표현 방법이지 실재 대상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표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 오래된 것들로부터 전해져 오는 기억의 감각을 현대화된 도면 작성 방법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기억

 
베르그송의 설명을 빌리자면 표상 체계는 인간적인 경험을 형성하는 지각과 기억의 혼합물로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경험이라고 지칭하는 실체는 지각과 기억에 의해 형성된다는 의미이며, 여기서 기억(Memory)은 단순한 심리적인 활동이 아니라 지속의 다른 표현이다.
 
부게로(Bouguereau)의 <비너스의 탄생(The Birth of Venus)>이란 그림은 사실적인 듯하면서도 사실적인 것과 또 다른 느낌으로 각인되는 인상적인 그림이다.
당대 부게로의 그림은 개인은 엄두도 내지 못할 가격으로 거래되었던 소위 프리미엄 스타 화가였지만, 근대적 미술 사조의 등장 이후 아카데믹한 기회주의자라는 오명과 함께 가장 저평가된 화가이기도 하다.
가로 218cm, 세로 300cm에 달하는 대작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있다고 상상해 보면 이 그림에 대한 강렬한 인상은 충분히 우리의 머릿속에 각인되고 남을 수 있을 것이다.
 
Bouguereau의 <비너스의 탄생(The Birth of Venus)>
Bouguereau의 <비너스의 탄생(The Birth of Venus)>
 
 
발칙한 질문을 해보자면 이 작품의 강렬한 인상은 과연 우리의 머릿속(뇌)에 저장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다.
베르그송은 6여 년에 걸쳐 진행된 기억과 실어증에 관한 풍부한 자료와 검토, 연구를 토대로 기억은 뇌에 저장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도출한 바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척수와 대뇌는 단지 복잡성에서의 정도 차이만을 지닐 뿐이며 대뇌는 표상 기관이 아니라 운동 기관이라는 통찰을 도출하기도 했다.
쉽게 동의할 수 없는 결과이며 당시 의학계의 반응 역시 당연히 냉소적이었다.
 
베르그송의 의견을 따르자면 이러한 작품으로부터 받은 일련의 인상은 지각과 기억이며 머릿속(뇌)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혼합물로써 신체 밖에 존재하는 일종의 연속적인 운동, 지속의 소산이라는 의미가 된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은 아니지만, 베르그송의 설명은 그 어떤 논의보다 실증적이고 체계적인 설명으로 정평이 나 있다.
 
지속이란 시간과 유사한 것 같지만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시간성과 조금 다른 의미이다.
시간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은 소위 추상화된 시간, 공간화된 시간을 의미하지만, 베르그송의 시간은 질적 변화의 연속이란 개념으로 어떤 운동이나 변화에 소요될 수밖에 없는 시간을 의미한다.
실재하는 것은 추상적인 공간이 아니라 구체적인 연장(Extension)이며 실재는 가득 차 있는 연속적인 전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인터스텔라>에서 5차원 공간인 테서랙트에서 아버지 쿠퍼가 물리학자인 딸 머피에게 모스 부호를 통해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은 비워진 추상적 공간이 아니라 연속적인 전체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쉽게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미신 같은 해석이겠지만 기억이란 대상을 설명하는 몇 가지 안 되는 탁월한 설명이기도 하다.
 
 
집 짓기에도 사람마다 집에 대한 각자의 기억이 있게 마련이다.
여기서 기억은 어린 시절 시골집 마당에서 뛰어놀던 추억 속의 집과는 다른 개념으로 추억과 기억은 구별이 필요하다.
 
주택 상담 과정에서 흔히 집에 대한 이런저런 바램을 듣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꽤 구체적인 내용도 있고 구체적인 듯하지만, 다분히 추상적인 내용도 적지 않다. 종종 어린 시절 시골집에서의 추억 같은 이야기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추억 속의 집을 짓고자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전문적인 표현이 서툴기 때문에 표현은 각자 천차만별이지만 이러한 표현들 속에서 감지되는 공통된 표상은 결국 기억에 관한 것들이다.
 
예를 들면 한옥의 처마와 툇마루와 같은 공간은 누구나 마다하지 않는 공간이며, 지표면에서 일정 높이에 위치하는 테라스와 같은 공간, 여름철 햇빛에 그늘을 만들어주면서 시원한 바람을 만끽할 수 있는 대청마루와 같은 공간, 담장으로 마당 일부가 적당히 가려진 공간, 마당 한쪽 단출한 정원과 같은 생각들은 전혀 이견이 없는 집에 관한 생각들이자 기억들이다.
누구 하나 건축에 대한 전문 교육을 받아본 적 없는 사람들이며 한 번도 이런 집에서 살아본 적은 없는 사람들이지만,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이러한 공통 감각들은 기억의 소산이 아니면 달리 설명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공통 감각이란 단어를 사용했지만 좀 더 엄밀하게 오래된 것들에 대한 기억이 연속적으로 지속하는 기억과 같은 의미이다.
 
대전 하기동 단독주택 바흐의 집
대전 하기동 단독주택 바흐의 집
 
 
집이란 대상을 생각할 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은 꽤 유의미한 대목일 것이다.
집 짓기를 준비하면서 기억의 의미를 되짚어 보아야 하는 이유는 기억을 통해 삶과 집에 대해 잃어버린 혹은 찾고자 하는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옛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나 무한한 맹신적 애정은 기억의 가치와 전혀 무관한 것들임을 유의해야 한다. 한옥에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한옥이란 기억 속에서 발현하고 있는 낯설지 않은 친숙함이 중요한 부분이다.
기억은 머릿속에 저장된 관념이나 환영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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