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건축의 시선, 고유성과 특이성 

집 짓기 현실에서도 집에 대한 전통적인 시선과 현대의 다양한 시선들이 다층적으로 얽혀있다. 문제는 집에 대한 다양한 시선들이 문제라기보다 체계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건축은 당대 경제, 사회, 문화적 역량의 총체인 만큼 건축에 대한 다양한 스펙트럼과 더불어 체계성의 문제는 건축이 다른 장르와 구별되는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다양한 건축의 시선, 고유성과 특이성 

다양한 시선

 
적당한 햇살이 비치는 어느 날, 처마 아래 테라스와 마주하고 있는 정원의 진달래와 더불어 커피 한잔 마시고 있는 장면(Scene #1)은 행복한 상상 중 하나일 것이다.
장면(Scene #1)은 순간, 찰나에 대한 이미지들이며 일종의 사건으로, 공간, 장소, 시간으로 구성된 일종의 기호적 표상이다.
‘처마 아래 테라스’라는 표현은 일종의 공간적 표현이며, ‘테라스와 마주하고 있는 정원’이란 표현은 장소적 표현이다. 구체적인 시간을 명시하고 있지 않지만 ‘진달래와 적당히 햇살이 비치는 어느 날’이란 표현은 4월이란 시간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장면은 장면 Scene #1, 장면 Scene #2, 장면 Scene #3 …. 등 다양한 연속적인 장면으로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며, 실제 건축을 구성하는 요소들로 상정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건축 전문가들에게는 낯선 방법이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익숙한 방법으로 장면들의 연속적인 관계가 집에 관한 생각이고 건축인 것이다.
 
건축을 이러한 관점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은 근래의 매체, 영화 산업 등이 보편적 문화적 범주로 자리 잡으면서 가능한 관점이다. 만약 르네상스 시대에 건축을 공간, 장소, 시간으로 구성된 기호적 사건의 연속적 관계라고 주장했다면 무시하기 딱 좋은 말이거나 대화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마 20세기 초까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과거와 현대의 건축은 관심의 영역이 전혀 다르다는 뜻이다.
 
판테온
판테온
 
건축의 중요한 대상으로 공간이란 주제가 자리 잡은 것은 모더니즘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모색하면서 등장한 개념이다. 그리고 새로운 전통이 된 근대적 공간 개념은 오래지 않아 현상학적,기호학적 가치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분화하는 중이다.
속도감 있는 변화의 양상은 건축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보다 문화라는 심급 속에서 기호로써 소비함에 주저함이 없다. 인문학 열풍 역시 이와 유사한 맥락이며, 일생일대의 과업과 같았던 집 짓기에 대한 무거운 생각들조차 하나의 사건이자 이벤트적 행위로 치환하고 있는 집 짓기의 모습 역시 유사한 맥락이다.
건축가들조차 공간, 장소, 시간이란 대상을 기호화하여 사용함에 주저함이 없으며, 과거의 공간론에 얽매이거나 이를 바이블처럼 섬기는 일도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덕분에 집 짓기를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혹은 장면들의 연속적인 관계로 생각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오래전 건축을 제외하면 건축은 한때 미술사에 기대어 자기 모습을 변화했고 철학적 사유를 참조하지 않으면 자기 모습조차 올곧게 해석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건축이 의존적이고 나약하거나 고유성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예술은 종언을 고한 지 이미 오래이며 화가는 화가가 아닌 예술가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으며, 예술은 스스로 학대하며 더욱 고립된 영역으로 방황하려 하고 있다. 철학은 범접할 수 없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사유의 중심에서 밀려난 지 오래이며, 인문학을 빙자한 리버럴 아츠(liberal arts)와 비교당해야 하는 수모를 겪고 있다.
예술과 철학 모두 아직 과학이 발견하지 못한 얼마 남지 않는 밤 바다의 해안선 일부를 비추고 있을 뿐인 등대와 같은 도구로 전락할지 모르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물며 건축 또한 스스로 올곧게 살아가고 있지 못함이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다.
모더니즘 건축이 회화에 빚을 지고 있는 만큼 현대 건축이 철학적 사유에 기대고자 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오랜 여행을 끝내고 어머니의 품과 같은 사유와 예술, 기술이 공존했던 오래전 가치 체계 근처를 기웃거리고 있는 모습은 역설적이지만 바람직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앞서 장면(Scene #1)을 공간, 장소, 시간으로 구성된 기호로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은 현대 철학의 사유 덕분이다.
그리스의 아라호바(Arachova)라는 작은 마을은 드라마 태양의 후예 촬영지라는 사건으로 인해 존재 여부도 몰랐던 장소가 한순간 친근한 장소로 치환되고 있는 사례이다. 머나먼 남의 나라 땅이지만 송중기와 송혜교라는 이미지가 링크되는 순간 왠지 모를 동경의 장소로 탈바꿈하게 된다.
 
아라호바 마을
아라호바 마을
 
이는 비물질적인 표면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환각, 시뮬라크르이며 태양의 후예와 아라호바 마을의 의미 작용은 주체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장면(Scene #1)의 의미 작용은 지각이나 주체성, 사물성에 의한 것이 아닌 부유하는 기호 그 자체일 뿐이다.
 
영화화된 건축은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통해 각자의 필요에 따라 각자의 필요한 부분만 오려내어 편집이 용이하며, 건축의 장소와 공간은 인스타그램용 이미지로 치환되기 주저함이 없으며, 기호화된 건축은 소프트한 프로그램으로 인식되어 누구나 프로듀싱이 가능할 것 같은 대상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그래서 아침 드라마 같은 집 짓기도 있으며 SF 액션 판타지 사극 같은 집 짓기도 있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과거의 건축에 대한 시선은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건축(물)이란 대상을 표현하고자 함에 있어 사용되는 전통적인 방법이 원근법, 평면(Plan), 입면(Elevation), 단면(Section)과 같은 표현 체계이다. 이러한 방식은 입체적인 건축을 종이 위에 표현, 재현하기 위해 고안된 X, Y, Z축 중심의 가상적인 공간 체계 방식이며 일종의 드로잉 방법이기도 하다.
이러한 방법은 실증적일 것 같지만 사실 다분히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며, 사물의 객관적 재현이 아닌 인간의 눈에 비친 주관적 영상에 불과하다. 피카소의 절친이자 입체파의 대표적 화가 브라크는 과학적 원근법은 단지 눈을 속이는 환영 주의라는 견해를 피력한 바가 있다.*
 
원근법은 르네상스 시기 고안된 것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건축 실무에서 문제의식 없이 통용되고 있는 방법이다. 심지어 이러한 방법을 통해 생산되고 있는 설계 도면이야말로 건축가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자 역할로 한정 짓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며, 종종 숭고미와 같은 경건함의 대상으로 도면을 설명하는 경우도 목격할 수 있다.
엄밀하게 시-지각 중심의 관점이며 실재와 무관한 사람의 인식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추상적 표현 체계라고 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건축적 표상은 다분히 형식주의적이고 회화적인 방법론과 유사한 점이 적지 않으며 건축가조차 건축가와 화가를 혼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국내 건축가들에게 유독 이러한 경향이 만연해 있다. 건축에 대한 전통적인 시선이라기보다 전근대적인 시선이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현대미술이 입체파 시절 이미 이러한 관점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가치 체계로 전이했음을 참작하면 건축가의 작업 방식은 충분히 전근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집 짓기 현실에서도 집에 대한 전통적인 시선과 현대의 다양한 시선들이 다층적으로 얽혀있다.
문제는 집에 대한 다양한 시선들이 문제라기보다 체계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건축은 당대 경제, 사회, 문화적 역량의 총체인 만큼 건축에 대한 다양한 스펙트럼과 더불어 체계성의 문제는 건축이 다른 장르와 구별되는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체계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는 전통적인 시선이든 또 다른 시선이든 건축의 고유성과 특이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 짓기 현실이 아침 드라마나 SF 액션 판타지 호러 무협 사극과 같은 상황이 발생하는 이유 대부분은 이러한 건축의 고유성과 특이성, 체계성에 대한 인식의 부재 때문이다.
 
 
 

고유성과 특이성

 
현실 속 일상의 대부분은 문화라는 범주로 흡수되어 가고 있다.
과거 건축가들이 말하던 소위 건축적 언어는 문화라는 범주에서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원근법과 X, Y, Z축이란 가상의 공간 체계 속에서 건축을 표현하고자 하는 방식 자체가 의미 있는 방식일 수 없는 시대인 것이다.
 
언급한 장면의 묘사는 건축을 표현하는 또 다른 시선임을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건축의 고유성과 특이성을 포함하고 있는 표현 방식이라고 할 수 없다.
 
시뮬라크르는 들뢰즈적인 표현으로 사건이며 특이성 혹은 특이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서린이가 대학생이 되었다’라는 것은 일종의 사건이며 사건 자체는 비물질적이다.
문제는 건축은 추상적인 대상도 아니며 비물질적인 대상은 더더욱 아니라는 점이다.**
장면 Scene #1, 장면 Scene #2, 장면 Scene #3…. 등 다양한 장면들의 연속적인 관계를 구성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집이 되고 건축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만, 이러한 방식은 영화 제작 방식으로 유용한 방식이다.
영화는 이미지들의 차이와 반복, 시뮬라크르의 순간적인 사건의 계열화만으로도 의미를 생성하고 있지만, 건축이 이러한 방식을 채택하는 순간 집 짓기의 대부분은 아침 드라마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미 현실은 온통 비물질적인 가치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지만, 건축은 비물질적인 가치만으로 건축이 될 수 없는 특이성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다.
 
물론 장사가 잘되는 카페를 신축하고자 한다면 건축가의 전통적인 설계 프로세스보다 영화 제작 방식과 같은 스토리 북을 우선 구상하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방식은 봉준호 감독의 시나리오 제작 스케치를 통해 충분히 의미 있는 방식으로 검증되기도 했다.
 
양양 부띠크 빌라 비온후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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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대중은 존재론적 가치를 탐구하는 일상보다 영화와 같은 시뮬라크르적인 대상에 환호하고 공감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예술은 물론 인간의 사유 역시 비물질적 개념으로 치환되고 있으며, 양자역학이란 과학의 선두 주자 역시 과학조차 물질이 아닌 비물질적 대상일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시뮬라크르로 환원되지 않고 인간에게 남은 유일한 대상인 신체조차도 DNA 복제 기술과 인공지능, 로봇과 같은 기계로 치환되어 사이보그로 대체될 수도 있는 혁신적인 시대를 코앞에 두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비물질화되고 시뮬라크르로 대체되더라도 가장 마지막까지 환원되지 않은 대상으로 남아 있는 것이 인간의 신체, 몸일 것이다. 그리고 환원되지 않은 신체가 존속하는 한, 건축은 신체의 거주성이나 물질성을 전적으로 소거할 수 없는 특이한 대상***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신체성이 환원되지 않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적당한 햇살이 비치는 어느 날, 처마 아래 테라스에서 마주하고 있는 정원의 진달래와 더불어 커피 한잔할 수 있는 삶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 진중권 저,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모더니즘 편』, ㈜휴머니스트, 2011, p.287, p.64.
** 이정우 저, 『시뮬라크르의 시대』, 거름, 2002, p.111, p.116.
*** 장 보드리야르, 장 누벨 저, 배영달 역, 『특이한 대상 건축과 철학』 中 역자 후기 강혁, 동문선, 2003,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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