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폐된 공간, 공간의 귀환 

공간의 중요한 건축적 대상이지만 과거의 공간과 현재의 공간에 대한 의미는 생산물, 생산 양식이란 관점에서 전혀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은폐된 공간, 공간의 귀환 
 

은폐

 
거짓은 아니지만 사실인 것도 아닌 것, 사실을 쉽게 분간하기 어렵거나 판단이 모호한 경우 은폐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장미의 이름(Il nome della rosa)>은 당대 집권 세력인 교회의 안위 문제에 있어 가장 위협적인 웃음(희극)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을 은폐하기 위한 수도원 이야기이다.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에서 회사원 네오가 살고 있는 현실은 알고 보니 흰색 정장 차림의 노신사로 묘사되는 아키텍츠(Architect)가 창조한 가상 세계였다.
 
속초 단독주택 노학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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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일상 속에서도 이와 유사한 상황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심플하고 모던한 북유럽 디자인 감성이란 말은 어떤 의미일까. 대략적인 느낌과 의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엄밀하게 출처와 정체를 알 수 없는 광고성 문구에 불과하다.
 
아파트 분양 광고에 등장하는 수많은 문구 역시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 맞는 말이라고 볼 수 없는 문구도 적지 않다. 현행법을 위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교묘하게 사실과 다른 부분도 있다.
유명한 가구-인테리어 회사로 알고 있는 어떤 회사는 사실 가구를 직접 만들지 않으며, 실제 설계와 시공은 개별 대리점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브랜드와 광고 문구는 가구-인테리어 회사가 틀림없지만 OEM 방식의 유통 회사라고 해야 한다. 당연히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파트를 비롯한 대부분의 주거 건축물에 사용되는 대기업 PVC 창호는 PVC 시스템 창호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성능과 품질 수준이지만 살고 있는 집에서 PVC 시스템 창호가 설치된 경우는 거의 발견할 수 없다. 광고 속 여배우들의 미소 덕분인지 어떤 의심이나 의문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
친환경 등급이라고 강조하는 각종 자재 역시 기준을 교묘하게 적용하거나 출처와 근거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이 외에도 사실을 쉽게 분간하기 어렵거나, 거짓은 아니지만 사실인 것도 아닌 경우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법률과 각종 제도는 합리적이며 무결점할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사실 관계가 전도되어 있거나 수많은 오류로 점철되어 있다.
거짓이라기보다 객관적 사실 관계가 왜곡, 은폐되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회적 구조와 메커니즘 역시 이와 유사하다.
소위 모더니티를 구성하는 부르주아, 자본주의, 과학기술, 국가 등의 상호 관계는 선형적 관계로 설명할 수 없는 다중적이고 복잡한 상호 관계성으로 얽혀져 있다.
복잡한 만큼 일정 부분 오류가 있을 수 있고 오류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구조와 체계가 특정 계층에 사유화되어 복잡하고 심각한 문제를 양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유화의 문제는 원인을 파악한다고 해도 대안을 마련하기 어렵다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완벽한 창조자인 아키텍처(AI)가 창조한 세계에도 스미스 요원과 같은 오류와 바이러스를 통제할 수 없었다. 사회적 구조와 체계의 사유화는 정교하게 기획된 의도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오류이자 바이러스인 셈이다.
 
게오르크 짐멜(Georg Simmel)의 <돈의 철학(The Philosophy of Money)>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생산 양식이며 역사적, 사회적 세력과 더불어 새로운 질서가 되고 있다.
물질 중심의 자본주의는 많은 비판을 받고 있지만 새로운 정신문화를 작동하고 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집 짓기 시장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것들이 왜곡되어 있고 은폐되어 있다.
객관적 사실 관계와 무관한 수많은 정보 속에서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간하기 쉽지 않다. 말 그대로 정글과 같은 집 짓기 생태계인 것이다.
장소와 공간은 집 짓기에서 중요한 문제지만 애매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 역시 무관하지 않다. 합리성이란 명분으로 평당 건축비와 비교 견적의 관행 속에서 건강하고 지속 가능하며 아름다운 집 짓기를 실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장소와 공간의 문제만큼 도시 문제 역시 혼란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다.
적지 않은 각종 정책과 기준, 매뉴얼이 즐비하지만, 의미 있는 내용들이 오롯이 실현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밀도 높은 아파트와 도시 문제 역시 다양한 의견과 개선점, 혁신을 요구하고 있지만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도시는 거역할 수 없는 대상이다. 혼잡하지만 상호 무관심하며, 자유롭지만 속내를 감추어야 하며, 화려하지만 한편으로 외롭고 쓸쓸하기까지 한 것이 우리의 도시이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이러한 도시에서 제의적 자본주의와 도시의 폭력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쇠퇴하고 낙후된 구도시의 삶의 질을 향상하고 도시의 경쟁력을 확보하고자 하는 도시재생 사업은 목적의 옳고 그름의 문제와 별개로 목적 자체가 실현 불가능한 사업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름답고 걷고 싶은 도시 만들기 또한 당연한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는 선전·선동이 될 가능성이 짙다. 21세기가 도래했지만, 여전히 19세기 파리 개조 사업과 같은 방식으로 도시·건축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법이란 일종의 제의, 의례의 개념으로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현하기 위한 법이다.
법은 왕이 만들지만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주권자는 하나님이고 왕은 법에 예속된 존재이어야 하지만 왕은 법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권력을 부여받은 존재로 왜곡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 은폐함으로써 백성에게 억압적 폭력성을 자인할 수 있는 타당성을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Zur Kritik der Gewalt)>의 주요 논점이자 요약이다.
 
 
사업의 의도와 목적은 훌륭하지만 내용과 형식이 전도된 것이 도시 재생 사업이며, 전국 도시재생 사업 중 가장 대표적인 사업은 부산의 감천문화마을이다.
산지 지형과 한국전쟁 등 급작스러운 인구 유입으로 인해 부산은 체계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도시가 아니다. 산복도로 마을 대부분 산비탈에 피난민들이 집단 이주하여 판잣집을 지어 거주하며 생성된 곳이다. 개인 화장실과 샤워 시설 하나 없이 공중화장실과 공중목욕탕을 사용해야 했으며 제대로 된 하수처리시설도 갖추어지지 않아 생활환경이 열악하였다.
이러한 감천문화마을은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마을미술프로젝트 응모에 선정되어 학생과 작가, 주민들이 마을 담벼락과 건물 외벽에 그림을 그리고 조형물 등을 설치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각종 유사한 사업을 통해 골목길을 새롭게 가꾸고, 골목길 투어 코스 개발, 마을 지도 제작 등을 통해 아시아의 마추픽추, 한국의 산토리니라는 별칭을 얻기도 한다.
단순히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는 환경정비사업의 차원을 넘어 문화 메카로 변신을 꾀하면서, 2016년 대한민국 공간문화 대상과 제1회 국제교육 도시 연합 우수교육 도시 상 등을 수상하며 감천문화마을은 한국 관광 100선 2회 연속 선정에 이르게 되고 중소기업청의 지역특화발전특구로 지정돼 문화, 예술, 교육, 도시재생 중심 거점으로 도약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울 마련하기도 했다.
외국인들의 방문도 꾸준히 늘고 있으며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 관심을 받기도 했다. 인근 천마마을이 도시재생 뉴딜 사업 시범 사업 지역으로 선정되면서 향후 지속 가능한 발전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며 아름다운 전경과 부산의 역사가 녹아 있는 마을 특성을 살리고, 기존 재개발, 재건축이 아닌 보존과 재생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한 성공적인 도시재생 프로젝트로 설명되고 있다.
 
산복도로, 부산
산복도로, 부산
 
하지만 이와 전혀 다른 평가가 공존한다. 관광지가 된 마을에는 원주민들의 비율이 해가 다르게 줄어들고 있다. 개발과 관광지 상권 속에서 주민 상생은 찾아보기 힘들어졌으며 기존 주택의 상당 부분은 외지인의 부동산 투자 대상으로 전락했고, 상권 형성에 따른 집값 폭등으로 원주민들은 월세를 버티기 어려워졌다.
9년간 810억 원이 투입된 산복도로 르네상스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거점시설들은 하나둘씩 흉물로 방치되기 시작했고 낙후된 계단, 난간, 보행로 등의 개선이 있었지만, 도시재생 거점시설들과 연계된 활용 방안 등은 묘연한 채로 낙후되었다. 벽화 그리기, 조형물 설치 같은 경관 사업도 이후 관리 부실로 역효과를 발생하게 되었으며, 아무리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고 멋진 건축물이라 한들 주민들이 원치 않는 작품이었고 건물만 덩그러니 세워 놓았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주민의 생활, 거주성과 괴리되어 있었고 지방자치단체의 실적 중심의 관치행정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2021년까지 총 414원이 투입되는 뉴딜 사업으로 선정된 감천문화마을 인근 천마마을을 두고 일선 지자체 도시재생 담당자들은 뉴딜 사업은 지역발전 로또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고 있다. 실제 뉴딜 사업 공모를 통해 5년간 전국 500여 곳 총 50조가 투입되었다고 한다.
 
벤야민은 파리에 체류하면서 관찰한 도시에 관한 생각을 10년 넘게 저술하게 된다. 파사쥬 프로젝트(Passagen Werk)라는 기획으로 벤야민의 미완성 프로젝트이다.
당시 벤야민이 보았던 파리는 19세기 파리 개조 사업을 통해 20세기 세계의 문화 수도로 발전한 파리의 모습이었다. 만약 벤야민이 부산의 도시재생 사업을 보았다면 어떤 저술을 남겼을지 궁금한 대목이다.
부산의 도시재생 사업은 하드웨어 중심의 파리 개조 사업과 달리 상대적으로 소프트웨어적이라 할 수 있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온갖 시뮬라크르로 가득한 추상화된 대상들과 막연한 개념들뿐이라고 혹평할 수 있다. 골목길에 벽화를 그리고 마을 지도를 제작한다고 아시아의 마추픽추, 한국의 산토리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비상식적이다.
아름다운 전경과 부산의 역사가 녹아 있는 마을 특성을 살리고, 기존 재개발, 재건축이 아닌 보존과 재생으로 패러다임을 전환의 성공 사례라고 이야기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은폐하고 있는- 왕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도시 재생 사업으로 보편적 가치를 획득하고자 할수록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51:49라는 보편성은 주권자의 거주성과 권리에 대한 은폐이고 억압이며 폭력인 것이다.
감천문화마을은 한 번쯤 가보고 싶은 장소일지 모르겠지만 평생 거주할 수 있는 장소는 아니라는 점이다. 도시재생 사업 뿐 아니라 재개발, 재건축 사업 역시 장르만 다를 뿐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공간의 귀환

 
한국 사회에서 건축 도시, 공간과 장소의 문제는 사실 한 번도 올곧게 모더니티적이지 못했다.
글로벌 시대임은 분명하지만 여전히 서양 중심 체계이다. 모더니티의 성립부터 현재까지 서양 중심이 아닌 것들이 의미 있게 논의되거나 중요하게 다루어진 적이 없다는 의미이다.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과 같은 개념 역시 지극히 서구적 관점의 허구에 가깝다.
 
한국에서 모더니티는 의도하지도, 준비되지도 못한 채 시작되었고, 식민지라는 상황에서 출발한 우리의 모더니티는 당연히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모더니티는 모든 대상을 기호로 환원하고 있으며 가상 현실은 단순히 가상 현실에 머물지 않고 전혀 다른 양상으로 실제 현실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시대에 이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공간이란 대상을 생산물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는 앙리 르페브르 견해는 다소 낯설지만, 설득력 있어 보인다. 르페브르는 공간은 아주 특별한 의미의 생산물이라고 설명한다.
특별한 생산물이란 의미는 손이나 기계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물체나 사물, 상품이 지니지 못한 총체성(globalité) - 전체성(totalité)과 구분되는 - 이라는 특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견해로, 공간을 생산물로 간주할 수 있을 때 공간의 문제는 혼란스러움을 벗어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한 공간은 생산물이지만 동시에 공간은 생산 자체에 개입하고 있다는 점이 공간의 또 다른 특이성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공간은 생산물이자 생산자이고, 경제적, 사회적 관계의 토대라는 의미이다. 다소 어려운 개념일 수 있지만 건축적 관점에서는 의외로 낯설지 않은 설명이다.
왜냐하면 건축 행위 및 집 짓기의 일련의 과정은 다양한 사회적 행위들이 밀도 높게 상호 관계성을 맺고 있으며, 개인과 사회, 기술 및 문화적 수준, 법률 및 각종 제도 등 당대 생산 양식의 총체성이 고스란히 투영된 것이 집 짓기이고 건축이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에겐 건축 행위는 짓는 행위 자체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지만, 건축의 주요 대상은 이러한 물리적 구축 행위를 포함한 물리적 체계가 에워싸고 있는 비워진 공간을 다루는 것이 포함된다. 더불어 비워진 공간에서 발현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과 행위에 대한 장소적 가치까지 고려하는 것이 건축 행위의 범주이다.
장소와 공간은 건축, 집 짓기의 주요 대상만큼 공간이 생산물로 간주하고자 하는 관점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현대의 장소와 공간은 기호로 가득 찬 상품화된 대상이며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적 생산물, 생산 체계를 기반하지 않고 장소와 공간은 성립할 수 없는 대상이다. 또한 다소 모호할 수 있는 장소와 공간의 개념적 구분 역시 생산물로써 설명하고자 한다면 장소와 공간은 결국 하나의 대상으로 간주 수 있다.
 
무엇보다 생산물로써 공간은 예술, 작품 등의 관점에 앞서 산업이란 범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건설과 구분되는 건축은 제조업, 건설업과 같은 2차 산업이 아닌 서비스 중심의 3차 산업이며, 4차 산업의 중요한 기반이다.
 
 
산업 및 사회과학적 대상이 된 공간은 원하든 원하지 않던 어떤 성격, 성향, 가치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공간이란 대상은 과학기술, 계급, 국민국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는 모더니티의 다양하고 복잡한 가치 체계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산물로써 공간은 근대 건축이 설정한 숭고하고 추상적인 공간 개념보다 실효성 있고, 은폐된 각종 사실을 회복, 치유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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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의 공간 기획, 공간 디자인, 스페이스 브랜딩 등의 개념은 건축적 대상이 3차 산업에서 4차 산업으로 이행되고 있는 과정에서 등장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공간이란 개념을 중심으로 일반인들에게 건축적 대상을 보다 트렌디한 관점에서 관심과 유용한 가치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들이 생산물, 산업이란 속성의 건축적 가치관과 공존하지 않고자 하는 경향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브로노 제비(Bruno Zevi)가 건축의 주인공은 공간이라고 주장했던 20세기 중반, 건축에 대한 무지하고 무관심한 대중에 대해 건축사가와 건축비평가의 분발을 종용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참고한다면, 반세기 만에 공간은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대중과 친밀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건축가들이 유의해야 할 점은 과거 공간의 가치를 언급했던 주체는 건축이 분명했지만, 현대에서 공간을 다루는 주체는 반드시 건축가는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전통적인 건축 방법론에 안주한 건축가들에게 현재의 공간은 과거의 공간과 전혀 다른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공간을 생산물, 산업적 대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점은 건축가들에게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일례로 전통적인 건축가의 업역이었던 부동산 개발 사업에서 건축 기획 업무는 이제 플랫폼 서비스에서 몇만 원만 결제하면 몇 초 만에 결과물을 받아 볼 수 있는 시대이다.
 
또한 건축의 한편에서 여전히 건축 공간의 숭고미를 부르짖고 있는 건축가들도 적지 않다. 다양한 대중음악의 가치들이 보편화하고 있는 현실에서 클래식만이 고유한 정통 음악이라고 말하는 것과 유사한 상황이다.
공간은 예술 작품적 대상 일리 만무하며 숭고하고 개념적 대상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현실을 자각해야 한다. 실재하는 구체적 생산물로써 다루어질 수 있어야 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건축가의 역할 또한 새로운 시대에 발맞추어 보다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함이 필연적인 수순이다.
과거와 다른 모습으로 귀환한 공간이란 대상은 더는 건축가들의 전유물이 아님을 주의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 앙리 르페브르 저, 양영란 역, 『공간의 생산』 p.25~26, 에코리브르,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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