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시간의 결핍과 사유화

공간, 시간 등과 같은 대상에 대한 설명과 해석이 어려운 이유는 결국, 결핍되고 사유화되었기 때문이다.
공간, 시간의 결핍과 사유화

결핍된 공간과 시간

 
공간과 시간은 일상생활에서 친숙하게 사용되는 단어이다.
공간은 말 그대로 공간이며 시간은 말 그대로 시간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막상 구체적인 의미를 설명해 보고자 한다면 쉽지 않은 대상임을 알게 된다.
건축에서도 공간과 시간은 철학적 사유부터 과학적 해석의 범주까지 다양하고 복잡한 각종 담론이 무성한 대상이다.
삶과 일상, 각종 도구와 생산물, 도시와 문명, 심지어 정신과 문화의 영역까지 대부분 구체적인 것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건축에서 공간과 시간의 문제는 대체로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 탐닉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인문학을 빙자하여 공간을 비어 있는 물리적 대상으로 설정하며, 시간을 관념적 사유의 대상으로 치부한 텍스트적 수사는 전형적인 모습들이다.
 
하지만 추상과 숭고미의 가치로 제의화된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인식은 건축의 결핍을 초래하고 있으며, 오롯한 의미를 해석하기 힘겨워함이 역력하다. 한때 심원한 건축의 중심 테제였지만 권위가 예전 같지 않고 심지어 철 지난 담론 취급을 받기도 한다.
 
반면, 언젠가부터 등장한 공간 기획(자)이란 용어는 건축가들의 모호한 태도와 달리 자신감과 확신이 느껴지기도 한다.
가구 디자이너, 인테리어 디자이너도 공간 기획자를 자처하고 있으며, 부동산 중개, 개발업자들도 공간 기획자를 자처하고 있다. 이들에게 공간은 철저하게 기호화되고 상품화된 공간에 대한 인식이다.
 
속초 스테이 오롯이
속초 스테이 오롯이
 
 
패러다임은 빠르게 변화해 가고 있으며, 속도의 차이만큼 현재와 과거의 인식 체계는 현격한 차이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균질하고 순수하며 결점 하나 없을 것 같았던 절대적 가치들은 알고 보니 결핍투성이이며, 끊임없이 분화와 팽창을 반복하고 있는 대상으로 밝혀지고 있다.
비움, 채움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설명되고 있는 건축물을 직접 방문해 보면 대부분 공허한 경험으로 남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물론 낯선 경험을 통해 특별한 경험의 순간이 될 수도 있겠지만, 실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거주자들에겐 지속적인 가치로 기억되는 경우는 드물다.
건축적 대상 대부분은 사진가나 미술관 도슨트와 같은 방식으로 일반인들에게 소개되고 있지만, 건축의 중요한 가치는 실제 거주자의 구체적인 경험과 만족도일 것이다. 건축은 그림과 같은 예술 작품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야 할 장소이자 공간이기 때문이다.
 
 
태양계의 운동 모델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태양은 정지 상태가 아닌 초속 260㎞/s로 은하계 표면에서 비선형적인 궤도 운동을 하고 있으며, 지구를 포함한 행성은 이러한 태양을 쫓아가면서 자전과 공전을 병행하고 있는 볼텍스(Vortex) 운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말 그대로 역동적인 공간에서 살고 있다.
 
메타세쿼이아가 늘어선 산책길을 걷고 있다고 상상해 보면, 계절에 따라 느낌이 다르겠지만 어떤 계절이든 아마 기분 좋은 산책일 것이며 때에 따라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산책 시간을 몇 시 몇 분부터 몇 시 몇 분까지 걸어야 한다고 의식하지 않으며, 각자의 걸음걸이에 맞게 37분이 될 수도 있고 1시간 08분이 될 수도 있다.
반면 일상에서 잠자는 시간, 밥 먹는 시간 등은 준수해야 하는 시간이며, 출퇴근 시간, 수업 시간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시간이다. 심지어 스마트폰 앱을 통해 5분 30초 후에 도착 예정인 지하철이나 버스 시간을 의식해야 한다. 시계는 시간이 아닌 기계일 뿐이지만 언젠가부터 삶은 시간이 아닌 시계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 또한 근대 산업사회의 핵심은 증기기관이 아니라 시계라고 언급한 바 있다.
 
시간에 대한 개념은 물리학에서도 아직 난감한 주제로 시간은 변화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도 있으며, 시간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도 있다. 어느 다정한 과학자의 강의를 통해 알게 된 사실로 뉴턴은 놀랍게도 아예 시간을 정의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I do not define time, space, place and motion, as being well known to all)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의미는 수학이란 도구를 통해 개념화된 대상일 뿐 명확한 실체, 과학적 사실관계를 단언하기 쉽지 않은 대상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공간과 시간이란 대상은 친숙한 단어와 달리 설명하기 만만치 않은 개념이다.
 
 
건축론에서 신약성서 첫 권인 마태복음과도 같은 지그프리드 기디온(Sigfried Giedion)의 <Space, Time and Architecture (공간·시간·건축, 1941)>은 지금도 영향력 있는 건축서 중 하나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내용을 참조해 보면 적지 않은 왜곡이 있을 수 있음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뉴턴조차 정의하지 않았던 - 정의할 수 없었던, 그리고 아직도 정의할 수 없는 - 시간과 공간의 문제를 버젓이 타이틀로 삼고 있다는 것 자체가 다소 경솔해 보이기까지 한다.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을 독송하는 것만으로 천국에 갈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점에서 건축에서 시간과 공간, 시공간의 문제는 숙고가 필요한 부분이다.
 
그동안 시간, 공간에 대한 건축가들의 설명이 일상생활에서 다소 현실감이 떨어졌던 이유는 결핍된 인식의 문제인 것이다. 물론 공간 기획자를 자처하는 이들의 시간, 공간에 대한 상품화된 인식 역시 일상적 가치를 오롯이 실현하기 힘든 것은 매한가지이다.
 
현대 과학은 공간이란 개념을 전기장 혹은 중력장과 같은 대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시간은 열역학적인 엔트로피의 변화 양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과학자들이 공간과 시간을 설명하는 방정식에는 ‘위와 아래’, ‘전과 후’와 같은 대상은 존재하지 않지만, 건축가들이 생각하는 공간과 시간에는 여전히 ‘위와 아래’, ‘전과 후’와 같은 개념들을 차용하고 있다.
일반인들에게 건축가들의 시간과 공간, 시공간에 관한 이야기들은 전래동요나 무속신앙, 전설의 고향 같은 이야기들로 치부되기에 십상이다. 시간과 공간, 시공간에 대한 건축가들의 고집스러운 생각들은 결핍된 인식의 소산인 셈이다.
 
속초 스테이 오롯이
속초 스테이 오롯이
 
건축 못지않게 시간과 공간을 기반으로 하는 장르로 음악이 있다.
음의 높낮이, 조직, 화성은 공간적이며 템포(Beat per Minute)와 박자는 시간적이다. 음표와 쉼표의 길이는 간격을 달리하여 리듬을 만들어내지만 절대적 틀 속에서 갇혀 있지 않는다.
음악은 분명 시간, 공간의 문제를 기반하고 있지만 음악을 음악답게 만드는 것은 선율의 고유성이다.
추상적 시간과 공간을 기반한 음악보다 건축은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을 다루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 일상에서 기억되며 울림이 있는 대상은 건축이 아닌 음악인 경우가 많다.
 
건축은 공간에 대한 절대적 의미나 숭고함, 예술적 가치를 논하는 것보다 어떻게 공간적 선율을 구현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관념적인 수사, 형태, 의장 등과 구분되는 디자인으로써 건축적 행위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바흐는 수많은 음악적 결과물 속에서 스스로 음악을 예술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으며, 베토벤 역시 예술을 위한 음악을 만들지 않았다.
완공 후 한 번도 경험할 수 없는 입면도에서 수학적, 미학적 비례 등을 논하며, 매스의 관입과 분절이란 그럴싸한 건축가들의 유희적 익숙함은 지양되어야 한다.
 
 
 
 

사유화

 
도시의 공간, 주거 문제는 오늘날뿐만 아니라 산업혁명 전후 근대 도시에서도 중요한 문제였다.
당시 서민 계층은 통풍이나 채광조차 원활하지 않은 지하 공간에서 거주해야 했고 주거 환경은 황폐해져 갔으며 슬럼 지역은 나날이 확장되어 갔다.
영국에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전원도시나 공업 도시 등과 같은 모델을 제시하기도 했으며, 1899년 전원도시 협의회(Garden City Association)가 결성되기도 한다. 구글 맵을 통해 레치워스(Letchworth), 웰인(Welwyn) 지역을 검색해 보면 당시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과 1차 세계대전 종결과 함께 전개된 근대건축 운동에서 건축가들은 소위 시대정신(Zeitgeist)을 언급하며 이상적인 주거 개념을 설정하고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공업 생산이 가능하고 적절한 채광과 통풍 등 위생적 요구를 충족시키며 사회구성원의 전반적인 생활 조건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근대 건축가들이 생각했던 사회구성 모델은 산업화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이며, 개인의 집합이 사회라는 단순한 개념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맥락에서 주거-단지-도시계획의 합리적 계획과 표준화 등을 주요 주제로 1927년에는 슈투트가르트에서 독일공작연맹 주최 주택 전시회가 열렸으며, 1928년에는 근대 건축 국제회의(CIAM) 등 다양한 공공 활동이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노력은 양적으로 부족한 주거 문제 개선에 이바지한 것은 사실이나 건축가들의 모더니티에 대한 맹신의 결과는 적지 않은 오류와 부정적 결과를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모더니티로 인한 문제를 모더니티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일련의 노력과 성과들이 반드시 성공적이었다고도 할 수 없다. 이러한 방식을 국제주의 건축양식(International Style)이란 이름으로 건축사는 기록하고 있다.
모더니티의 변방인 한국 사회에서도 소위 아파트라는 유형의 건축물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소위 강남개발과 더불어 1973년 반포주공아파트 출현을 통해 본격적인 아파트 공화국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90년대 강남은 초고층 아파트로 변모하기 시작하였고 끊이지 않는 재건축 논란으로 늘 이슈의 중심이 되고 있다. 도시의 공간, 주거 문제의 근원은 사회과학적 해석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한 대상이다.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의 견해를 참조하면 사유화라는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사유화 문제는 근현대 사회에 갑자기 나타난 양상이 아니라 고대사회부터 지속한 문제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왕, 교회, 귀족이라는 주체가 부르주아로 달라졌을 뿐이다. 또한 근래의 양상은 특정 계급이 아니라 국민국가라는 체계(System)에 의해 사유화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사실 시계와 시간표에 삶을 구속당한 당시 사람들의 피폐함은 시계라는 과학기술 때문이 아니라, 생산 양식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엄밀하게 과학기술의 성과를 특정 계층이 독점한 사회구조의 문제라고 해야 한다.
정보와 기술의 독점적 사유화는 특정 계층 지속적 영위성을 위해 필수적인 전략이다. 시계, 문자, 도서, 법 등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대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때에 따라 일종의 전략 무기이자 중요한 전략 물자란 의미이다.
 
19세기 나폴레옹 3세 시대 오스만(Baron Haussmann) 남작이 주도한 파리 개조 사업(Transformations de Paris sous le Second Empire) – 현재 파리 도시의 근간을 구성하고 있는 직접적인 사업이며, 당대 건축, 도시, 토목 관련 과학기술 등의 성과가 총동원된 사업 – 은 도시에서 공간, 주거 문제에 관한 긍정적인 사례로 종종 설명되곤 한다.
지금 파리라는 도시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샹젤리제 거리와 테라스 카페 등 이미지 상당 부분은 파리 개조 사업을 통해 형성된 도시적 인프라 덕분이다.
하지만 파리 개조 사업을 통해 부유층은 환호했고 노동자는 도시 외곽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특정 계층과 정치적 목적의 개발사업으로 당시 프랑스 2년 치 국가 예산이 투입되었던 전형적인 독점적 국가 주도 개발사업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서울의 강남 개발 역시 도시 긍정적인 개발 사례로 설명할 짙은 그늘이 공존하고 있다. 소위 한국에서 부동산 신화는 강남 개발의 빛과 그림자로 설명이 가능하며, 특정 계층, 체계의 공간에 대한 사유화 문제로 해석할 수 있다.
 
사유화된 공간과 결핍된 인식은 사회적 생산양식이란 체계 속에서 오롯한 공간의 가치를 실현함에 통곡의 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슬프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인식이다.
 
건축에서 공공성의 개념은 공공건축물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단독주택, 상가주택과 같은 작은 집을 지을 때도 공공성에 대한 문제의식은 세심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혼자 살아가는 사회가 아닌 것처럼 집 또한 도시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특히 아파트 공화국이 된 현대 도시에서 아파트가 고려해야 할 공공적 가치는 한둘이 아닐 것이다.
 
생각해 보면 아파트는 철저하게 공급자 위주의 거주 방식이다.
과거에 비해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지만 기본적인 속성은 자본화된 부동산 시장의 주택 상품이다. 소위 빌라로 대표되는 다세대 주택 역시 아파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파트가 자본 시장과 대형 건설사의 합작품이라면, 빌라는 제2 금융권과 건설업자의 합작품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국내 5대 재벌의 총자산이 GDP의 61%, 삼성전자 한 기업의 경제적 가치가 GDP의 13.0%에 달하고 있는 사회, 경제적 구조일 것이다.
다시 말해, 특정 계층 및 구조에 의해 사유화된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뜻이다.
 
사유화된 현실 속에서 거주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다양한 가치의 탐독은 사치일지 모른다.
만약 어떤 건축주가 정당한 비용을 내고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성능과 품질을 갖춘 집을 제대로 지어 보겠다고 해도, 집 짓기는 마냥 순탄하게 진행될 수 없는 현실이다.
건축법, 주택법, 지구단위계획 등은 최소한의 공공적 가치를 위한 법률적 장치 역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종종 어설픈 행정력으로 상황을 통제하고자 하지만 적지 않은 오류와 역풍에 무기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 * 손세관 저, 『도시주거 형성의 역사』 p.280~283, 열화당, 1997
Share article
RSSPowered by inb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