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과 ‘할복’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일상적인 단어가 품고 있는 압박감은 꽤나 무겁습니다.
정치권에서 자주 사용되어서일까요,
저의 경우에도 ‘책임’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제가 책임지고 사퇴하겠습니다.”
“지금 한 말씀에 대해, 초래할 결과에 대해 책임지실 수 있으십니까?”
정도의 비장한 문장들이 떠오릅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이 주로 실패에 해당하는 결과, 내지는 잘못된 일에 대해
‘본인의 탓임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불이익을 겸허히 받아내는 것’
정도의 뉘앙스를 풍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회사에서의 ‘책임을 지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의사 결정에 대한 모든 리스크를 짊어지고 사표를 내거나
감봉과 강등, 좌천과 해고를 받아들이는 것일까요?
그런 유형의 대응이 필요한 상황이나 역할 또한 물론 존재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실무자들이 마주하는 업무에서의 책임이 내포하는 의미는,
위와 같은 ‘할복으로 책임을!’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감당은 언제나 남겨진 자의 몫이다
끊임없는 변화에 대한 빠른 대응과 혁신이 중요해지면서,
조직문화에서 ‘자율’의 중요성 또한 강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명의 관리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하달하는 것이 어려워졌을 뿐만 아니라,
적재적소에 배치된 구성원들이 자율적인 의사결정을 내리는 구조가 훨씬 더 높은 창의성과 유연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책임’은 ‘자율’의 짝이 되는 가치입니다.
각자가 자율적으로 내리는 결정에 대해 책임을 함께 부여함으로써
자율의 오남용으로 인한 혼돈과 무책임을 막을 수 있습니다.
책임을 통해 자율과 효율의 균형을 달성할 수 있게 되는 셈입니다.
위와 같은 맥락을 고려할 때,
사후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리거나 징벌을 하는 것은 책임의 근본적인 목적과 거리가 멉니다.
단순히 그것이 구성원 당사자에게 비참하고 가혹한 처사여서가 아닙니다.
그런 식의 대처만으로는 기업의 발전 및 성과 개선에 근본적인 도움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과론적인 페널티를 물리는 방식만으로는 마이너스를 전가할 뿐, 플러스를 창출하지는 못합니다.
결과론적 실패에 대한 리스크를 오롯이 개인이 져야 한다면,
위험을 회피하고 싶은 구성원들은 점차 수동적으로 변할 것이며
결국에는 자율 자체가 유명무실해질 것입니다.
나아가 징벌로써 구성원 당사자를 해당 업무에서 배제하거나 날개를 꺾는 것은
결국 그 사후대처를 제 3자의 몫으로 이관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극단적일 경우, 이 역시 조직 차원에서 마이너스입니다.
실패가 더 이상 성공의 어머니가 아닌 그저 남남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직의 학습곡선은 완만해지고 회복 탄력성은 낮아질 확률이 높습니다.
(물론 근본적인 개혁 및 변화가 필요한 경우도 있겠지만요).
사태 수습, 개선 도모 등 모든 ‘감당’은 결국 남겨진 조직 및 타 구성원의 몫이 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할복으로 책임을!’은 역설적이게도 책임을 등지는 행동에 가깝습니다.
‘책임을 지는 것’을 결과에 대한 징벌로만 한정하는 것은 곧장 거부감으로 이어집니다.
웨비나 및 미팅에서 만난 관리자분들과 ‘자율과 책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모든 책임을 구성원 각자가 지도록 하는게 현실적이고 정당한 걸까요?”
“구성원들이 오히려 부담과 압박을 느끼지 않을까요?”
와 같은 질문이 자주 등장하곤 합니다.
위의 잘못된 전제를 바로잡지 않고서는 ‘자율과 책임’을 올바르게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구성원들이 싫어할까봐 책임을 빼고 자율만 제시하였다가는,
규모가 커짐에 따라 높은 확률로 혼돈으로 이어지게 되며
그렇다고 결과에 대한 징벌적 책임만을 부여했다가는
자율 자체가 유명무실한 빈 껍데기가 되고 말 것입니다.
소를 잃기 전에 외양간을 고치려면
‘책임’을 강조하는 이유부터 들여다 봐야 합니다.
조직 문화에서 자율과 책임을 강조하는 목적 또한 결국에는 “성과를 개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고려하며 ‘결과론적 징벌’에서 탈피한, ‘책임 지는 것’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산적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부여하는 것에서 나아가
연속적인 과정에 대한 책임으로 논의를 확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1) 과정에 대한 책임
각자가 책임을 부여 받은 업무의 진행 과정에 대해 더 좋은 성과를 위한 ‘최선의 의사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의사 결정에 대해서는 설명 가능한 근거가 있어야 하며, 그 내용 전반은 연관된 구성원들과 최대한 공유되어야 합니다.
공유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피드백 교환을 주도해야 하며, 확보한 피드백을 검토하고 반영함으로써 끊임 없이 ‘더 나은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최선의 의사결정은 점진적으로 최고, 최적의 의사결정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2) 결과에 대한 책임
결과론적, 정량적 목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또한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목표 달성 실패에 대한 책임은 시시비비와 징벌보다는 앞으로의 개선에 대한 고민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야 합니다.
책임자는 실패 및 문제의 발생 원인을 분석하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소통을 주도해야 합니다.
재발 방지 및 발전을 위한 합리적인 방안을 도출해야 하며, 그 내용 역시 동료들과 공유해야만 합니다.
목표 달성을 성공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공 요인 및 발견한 변수들, 정량적 지표 뒤에 가려져 있는 정성적 요인들을 정리해 공유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조직이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도록 기여해야만 합니다.
'과정에 대한 책임’과 마찬가지로, 이를 통해 최선의 의사결정은 점진적으로 최고, 최적의 의사결정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예측 가능한 동일한 유형의 문제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경우, 큰 규모의 전략적 개혁이 필요한 경우 등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개인 당사자의 처우’로 귀결되어야 하는 상황도 물론 존재합니다.
그러나 최소한, 그것이 디폴트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3) 그리고, 책임의 효율과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우리 조직이 어떤 목표를 세우고 어떻게 달성하고 있는지, 각 구성원(책임자)들은 어떤 목표를 세우고 어떻게 달성하고 있는지 공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책임자는 목표의 정합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율적인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나아가 해당 내용 역시 공유함으로써 충분한 양과 질의 피드백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구체적이고 즉각적인 피드백을 활성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최고의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고심한 최선의 의사결정조차도 우발적인 변수에 의해 끊임없는 수정을 요합니다. 따라서 피드백과 소통을 통한 꾸준한 개선이 가능해야 합니다.
동시에, 피드백은 빠르고 구체적일 수록 좋습니다.
실패의 실마리와 개선의 여지가 발견되자마자 논의 및 검토가 가능하다면, 방치 및 무지가 초래할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게 됩니다.
조직에는 위계가 존재하며, 구성원들은 때때로 심판자와 피심판자, 평가자와 피평가자가 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한 조직에 속한 이상 서로 힘을 합쳐 목표를 달성해야 할 ‘동료’입니다.
조직 내 책임에 대한 담론 역시 이를 전제로 이루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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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차고 안정적인 금요일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