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송길영 박사님의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를 읽고
Dec 02, 2023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p.73

집단주의의 폭력은 중학교 입학에서 시작했다고 기억하는분들도 많습니다. 아침마다 교문에서 맞아본 기억이 폭력의 출발입니다. 목까지 호크를 채운 단정한 검은 교복, 각도를 맞춘 명찰, 가방은 공손히, 모자는 반듯하게, 그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혼찌검이 났습니다. 무서운 선도부 선배가 앞에, 몽둥이를 든 선생님이 뒤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 군대식 문화에 여전히 길들여져 있는 '꼰대 아저씨'들을 비판하면서도 그들의 지난 이야기를 들어보면 짠한 마음이 듭니다. <친구>나 <말쭉거리 잔혹사> 같은 영화에서 구조적 폭력에 순응하지 않는 캐릭터는 대리만족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굴종을 거부한 그의 삶이 이후에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걱정되기 시작하는 순간, 스스로가 기성세대가 되고 있음을 느끼며 슬픈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엑셀을 못하는 L부장은 출근을 좋아합니다. 출근을 해야 K대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의 머릿속은 엑셀은 K대리가 하고, 결재를 해주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p.172

넷플릭스 출신인 도반 L에게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L이 본 넷플릭스는 일이 늘어나는 걸 막기 위해 매니저들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어떤 일을 할 때마다 끊임없이 '이게 진짜 필요한 일이야? 이게 정말 해야 되는 일이야?'를 까다롭게 물어본다는 것입니다. 규모가 큰 조직일수록 반드시 해야 하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판단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시스템 자체가 관료화되어 있으면 의도적으로 또는 본의 아니게 본질에서 벗어난 프로세스에 시간과 인력이 투입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p.180

생성형 AI로 빠르게 학습하며 새롭게 적응하는 구성원들은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상급자의 말을 소음으로 믿고 거릅니다. 이제는 각 개인의 축적된 경험보다 집합적으로 축적된 지혜와 어떻게 협력할 것인지가 중요해집니다. 그러니 '나는 20년 동안 나만의 경험을 쌓아왔다'라는 자신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지혜의 원료는 네트워크상에 있기에 딱딱한 권위의 액상화는 점점 더 가속화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중에게 울림을 주는 서사의 핵심은 목표가 아니라 의미입니다. '내가 이 회사에 20년을 다녔는데...', 1만 직원들과 함께 10조 매출을 냈는데' 같은 말에 감동적인 리액션을 햊루 인구 집단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청년들의 반응은 더욱 싸늘해서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표정입니다.

p. 326

L부장은 자신의 실없는 농담에 '자본주의 웃음'으로 화답하지 않으면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보고서의 문체를 지적하는 소심한 복수를 하기도 합니다. 무엇이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라고 하고선 회의 석상에서 후배가 세세히 설명하면 그는 듣지도 않습니다. '됐고, 이렇게 하는게 제일 좋아. 내가 다 해봤거든'이라고 말허리를 뚝 잘라버립니다. L부장 역시 인정 강박 속에 위축된 자존감을 드러내고 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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