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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집, 이해, 행복⬛ 좋은 집, 이해, 행복
집에 관한 이야기는 종종 ‘왜 집을 짓고 사는가?’ 혹은 ‘집이란 무엇인가?’ 등의 질문과 같은 본질적인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 아닌 강박관념이 있다.
이러한 ‘왜’, ‘무엇’이라는 종류의 의문사를 설정하는 순간 집 짓기의 이야기는 무한한 관념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기에 십상이다. 온갖 철학적 사유를 동반한 건축 미학적 수사와 역사적 논거, 건축의 합목적성 등에 기인한 전문적 의견 등 머리 아픈 논술을 피해 갈 방법이 없다.
‘왜 집을 짓고 사는지?’ 혹은 ‘집이란 무엇인지?’란 질문이 무의미하고 부질없다는 뜻이 아니다. 단편적인 생각일 뿐이라도 훗날 궁합 맞는 조력자에 의해 정제된 생각과 구체적인 집 짓기 방법을 찾아가는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왜 집을 짓고 사는지?’ 혹은 ‘집이란 무엇인지?’란 질문에 대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혹은 생각의 종착점이 어떻게 결론지어지든 한 번쯤 자신만의 생각들을 정리해 보는 것은 분명 유용한 시간이자 집 짓기 과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때론 개인의 숭고한 가치일 수도 있고 저마다의 엉뚱한 상상일 수 있으며, 가끔 절실한 필요성 혹은 합리적인 목적일 수도 있고, 또는 남들도 하니까 나도 한번 해보자는 단순한 논리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즐거운 생각일 것이며 행복한 고민일 것임은 분명하다.
이러한 생각의 시간을 통해 우리가 살고자 하는 집이란 대상은 ‘의문’의 대상이 아닌 ‘이해’의 대상임을 인식할 수 있다면 집짓기의 중요한 성과이다. 생각의 시간은 삶에 대한 진솔한 회상이나 소소한 일상적 가치 등을 생각해 보고 곱씹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짓고자 하는 집이 혼자만의 집이 아닌 도시와 사회 속에서 함께 공존하는 공동체 일부이며, 일정 부분 사회적 공공성도 함께 고려해야 하는 대상임을 이해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이처럼 집짓기에 관한 생각의 종착점이 어떤 해답이나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사람, 사회에 대한 ‘이해’임을 알게 된다면 우리의 집짓기는 이미 성공한 것인지도 모른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주변의 환경과 삶을 성찰해 보는 것을 시작으로 우리의 삶을 조금씩 이해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있다면 집은 오두막이라도 충분할 수 있으며 이해할 수 있다면 행복한 집짓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물론 현실 속의 집, 집짓기에 관한 생각은 밥 먹고 옷 입는 것에 관한 생각보다 비중이 무겁고 밀도가 높은 현실과 동떨어진 생각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집에 대한 이러한 다소 낯선 느낌 때문에 집의 원리와 우주의 원리가 닮았다는 등의 전설 같은 이야기들에 관심을 가지기도 하며, 예쁜 집 인테리어 구경하기, 전원 속의 나만의 집 등과 같은 키워드 검색으로 이어지기도 하며, 건축박람회장으로 발길을 옮기게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은 ‘좋은 집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건축 비평공동체 건축 평단은 2015년 창간호 특집 제목을 ‘좋은 건축이란 무엇인가’라고 쓰고 있다. 여기서 건축이란 단어 대신 집이란 단어로 치환하더라도 내용상 크게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좋은 집은 무엇인가?라는 제목만 보고 이곳에서 대답을 찾고자 한다면 적지 않게 당황할 수 있다. ‘좋은 집’이라고 하면 쉽게 연상할 수 있는 좋은 재료를 사용하고 튼튼하고 아름다우며 단열성능이 우수한 편리한 집 등과 같은 상식적인 대답은 이곳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내용 중 일부를 옮기자면 건축(집)을 기술과 예술 모두를 포함하는 술(術,:techne)로서 간주하여 기술과 예술 간의 구분에 집착하지 않고 건축(집)을 ‘거주-짓기-술’의 관점으로 해석하면서, 좋은 건축(집)이란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장소와 공간을 해명하는 문제로 규정하고 있다.
쉽게 번역하자면 좋은 집이란 집의 물리적, 형이상학적 속성을 포함한 ‘거주함’을 위한 체계적인 장소와 공간이란 의미가 된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좋은 재료를 사용하고 튼튼하고 아름다우며 단열성능이 우수한 집은 분명 좋은 집의 요건임은 사실이다. 다만 이러한 집의 물리적 속성 뿐 아니라 형이상학적일 수 있는 이야기들 역시 좋은 집의 요건 중 하나라는 점이다.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것을 사실이라고 인지하고 몰두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현실은 사실보다 이미지에 훨씬 많은 영향을 받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사용하는 ‘좋은’이라는 말 역시 사실 지극히 추상적이며 이미지화된 말이다.
일례로 ‘목조주택이 콘크리트 주택보다 친환경적이고 단열성능이 우수한 주택이다.’라는 단정은 반드시 사실이 아니다. 종종 기초콘크리트 두께를 600mm 시공했다고 해서 튼튼한 집이라는 건축주의 자평 역시 반드시 사실이 아니다. 기초의 성능은 두께가 두꺼운 것이 좋음의 기준이 아니라 지질조사를 통해 내진설계 기준에 맞는 구조설계와 토질 치환 및 잡석 다짐, 기초의 동결심도와 기초 단열의 상관관계 등 설계도서에 입각한 시공 여부가 튼튼한 집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더불어 삼중 유리 시스템창호를 사용한다고 해서 단열성능이 우수한 집이 아니라 기밀성과 열교 없는 디테일 등의 적용 여부가 주택의 단열성능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많은 예비 건축주의 소위 정보수집 활동을 통한 정보 대부분은 사물의 사실관계 및 실질적인 구체성과 다소 동떨어진 이미지화된 정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약 집의 물리적 속성에 대한 가치평가가 필요하다면 건축주의 정보활동에 의존한 판단보다 집짓기의 또 다른 주체인 건축가 혹은 관계 전문가의 조력을 통한 판단이 합리적일 것이다.
우리는 소통을 통한 점진적이고 합리적 공감대를 형성해 가는 문화에 대해 그렇게 익숙한 편이 아니다. 관심 있다면 ‘거주함’에 대한 유용한 가치와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는 현상학적 소산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도 있으며, 사회적 통념에 대한 날카로운 해석과 탁월한 비판을 인지할 기회는 충분하다. 그리고 독락당, 소쇄원과 같은 옛 건축의 DNA 또한 우리가 기억하지 못할 뿐 우리의 신체와 기억 속에 오롯이 압출 파일로 저장되어 있기도 하다.
얼마든지 삶과 집에 대한 일상적 가치를 이해할 기회는 충분하다는 뜻이다.
필요한 것은 이러한 몇 가지 흔적들을 머리와 가슴 속에 담아두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충분한 생각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다.
좋은 집에 관한 생각은 어려운 수사나 논거를 통해 탐닉할 필요가 없으며, 소소한 일상적 가치 속에서 하나하나 의미를 찾아가고자 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훗날 건축가의 조력과 소통을 통해 생각의 시간 동안 가졌던 의문과 쟁점들을 충분히 하나하나 정리해 나갈 수 있다.
왜 집을 짓고, 좋은 집은 무엇인가? 등을 고민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행복하기 위해서이다. 장황한 이유와 복잡한 설명, 구구절절한 수사가 필요한 질문이지만 결국 질문의 종착점은 행복이다.
건축은 환경, 인간, 기술, 사회, 미학 등을 이해하는 것을 근간으로 하여, 건축가의 건축적 행위를 통해 구체화하여 실현되는 일련의 과정이다.
집은 의문의 대상이 아닌 이해의 대상이며, 여기서 이해의 대상은 사물과 사람, 사회에 대한 이해이며,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우리 삶에 대한 이해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행복은 결국 이해하는 것이다.
유의할 점은 이러한 대상에 대한 이해가 지식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종종 이해를 어떤 지식 혹은 정보 등의 개념으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지식과 정보를 찾아 헤매고 건축박람회장을 누빈다고 해서 집과 우리의 삶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민과 방황의 시간을 가질 확률이 더 농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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