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디자인, 모더니즘의 사생아
모더니즘을 통해 건축은 예술의 대상에서 디자인의 대상으로 전환되었다. 현대 건축은 예술의 대상이 아닌 디자인의 대상 임을 기억해야 한다.
Jun 28, 2024
⬛ 디자인의 유래, 모더니즘
디자인이란 용어와 개념은 모더니즘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 건축물을 짓던 건축가는 지금의 디자인과 같은 관점에서 건축물을 짓지 않았다. 물론 건축가 또한 지금의 건축가와 그 시대의 건축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디자인이란 개념의 등장은 근대화라는 사회발전 단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대량 생산 체계와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디자인이란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모더니즘의 사회적 변화 양상은 예술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마디로 아방가르드 그 자체로, 모더니즘은 과거와 전혀 다른 양상으로의 사회가 태동하였음을 의미한다.
모더니즘은 역사적으로 연속된 대상이지만 그 양상은 단절에 가깝다고 해야 하며 한마디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우리는 현재 모더니즘 시대를 살고 있으므로 체감하기 어렵지만, 당시 모더니즘은 혁신이란 말로도 설명이 부족할 만큼 과거와 현격히 다른 시대를 의미한다.
그래서 모더니즘과 궤를 같이하고 있는 디자인이란 말의 뉘앙스에는 ‘새롭고’, ‘혁신적이며’, ‘창조적인’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건축 디자인이란 개념 역시 모더니즘 이전의 건축이 추구했던 가치, 방법, 목적 등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건축 디자인이란 개념이 정립된 것이다.
모더니즘 이전과 이후의 달라진 건축 양상에 관한 내용을 설명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분량지만, 용감하게 압축해 보자면 모더니즘 이전의 건축적 양상을 헤파이스토스(Hephaistus)적 건축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헤파이스토스는 그리스 신화의 기술, 대장장이, 장인, 공예가, 조각가, 금속, 야금, 불의 신으로 제우스와 헤라의 적장자이며 사랑과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가 그의 아내이다.
모더니즘 이전 건축의 또 하나의 양상을 ‘로고스(Logos)적’이라 할 수 있으며 말이란 뜻과 함께 이성이란 의미로 통용될 수 있다. 한마디로 법칙 혹은 이성을 근간으로 한 제작의 의미가 모더니즘 이전 건축의 주요 관점이었다.
모더니즘의 범주에서 건축 및 건축 디자인의 양상을 설명하는 것 또한 만만치 않은 영역이다.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할 만큼 방대한 내용이겠지만, 한 번 더 용감하게 압축해 보자면 분화이지 않을까 한다.
근대화를 통해 공예, 가구, 건축, 도시, 조경, 인테리어, 엔지니어링 등 소위 전문 영역이라는 것이 세분화하여 발전하게 되었고 모든 분야에 소위 전문가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전문성의 도래는 각 분야의 각자가 최고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고려된 방식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분업이란 양상과 맞물려 있다. 분업이란 능률적이고 최고의 기능을 추구하고자 고안된 장치이며 모더니즘 시대 새롭게 변모한 건축이 첫 번째로 선택한 화두 역시 기능주의였다.
그래서 디자인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는 계획, 제안, 결과, 제작, 방법론 등은 합리성, 효율성, 실용성, 기능성 등과 같은 가치를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새롭고 이성적인 가치 중심의 창조성이란 의미가 디자인이란 속성에 내재하게 된다.
하지만 모더니즘은 반백 년이 지나기도 전에 포스트-모던이니 탈-모던이니 해체니 하면서 모더니즘의 문제점을 하나둘씩 성토하기 시작했다. 효용과 효율 중심의 극단적 기능 주의는 당연히 피곤할 수밖에 없다.
불, 기술, 장인 등의 개념을 상징하는 헤파이스토스는 모더니즘에의 개별 전문가들로 해체되었다. 모더니즘 이후 장인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더불어 헤파이스토스와 함께 살던 시절에도 팜므파탈이었던 아프로디테는 모더니즘으로 인해 당당한 미망인이 되어 예술이란 새로운 동반자와 함께 제2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아름다움과 예술의 가치 또한 모더니즘을 통해 전혀 다른 양상과 지향점을 가지게 된 것이다.
모더니즘은 헤파이스토스와 아프로디테의 일종의 이별 이야기라고 할 수 있으며, 건축에서 디자인과 공학 및 건설의 영역, 예술의 영역 등이 각각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현대의 건축이 예술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은 이러한 헤파이스토스와 아프로디테의 결별 결과이기도 하다. 이혼 사유는 모더니즘으로 인해 헤파이스토스는 가장으로서 생활 기반을 상실했기 때문이며, 아프로디테는 더 이상 전통적인 가치 속에서 속박당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건축이 예술의 주변을 기웃거리며 건축가가 예술가가 되고자 하는 욕망은 일종의 조강지처에 대한 그리움이다.
⬛ 모더니즘의 사생아
문제는 이러한 디자인 전문가로서 건축가의 모습은 매우 합리적이고 효율적 일 듯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는 점이다.
현대의 건축가들은 건축가라는 동일한 명칭으로 타이틀을 공유하고 있지만 저마다 전혀 다른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 일반인들은 구별이 어렵겠지만 건축가들의 양상은 천차만별이다. 모더니즘으로부터 파생된 소위 전문가 시대는 얼핏 보면 이상적이고 합리적일 것 같지만 한편으론 치명적인 오류와 약점을 가지고 있다.
전문성은 분업과 협업 시스템 속에서 유효한 방법으로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면 전문성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분업과 협업 시스템 중 가장 합리적이어야 할 관료조직은 대량생산 체계를 갖추었음에도 전혀 합리적이지 못하며 오히려 적폐의 대상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집 짓기와 같은 소규모건축물 범주 역시 대량 생산 체계와 사뭇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는 분야이다.
그리고 세분된 분야만큼 너무 많은 전문 분야와 너무 많은 전문가를 양산하고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맹점이다. 사실 누가 전문가이며 왜 전문가인지 구분하기도 쉽지 않다.
무수히 많은 전문가가 존재하지만, 전문가로서 수준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엄밀하게 전문가 시대가 아니라 자격증 시대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지 모른다.
소규모건축물 시장에서 현대건설 10년 경력, 정림건축 10년 경력이 암시하는 전문성은 그 조직에서 전문가였는지 모르지만, 소규모 건축물 시장에서는 전혀 전문가일 수가 없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시스템이 없으면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전문성이 모더니즘의 전문성이며 시스템이라는 것이 만능일 수도 없다는 것이 모더니즘의 오류이다.
헤파이스토스와 아프로디테의 이별을 통해 탄생한 건축 디자인의 모습은 기대했던 만큼 이상적이고 합리성을 갖춘 모습이 아닌 것으로 판되고 있다. 오히려 개별 영역으로 나뉘어 서로를 그리워하며 다중적 관계성을 맺게 되는데 그 모습이 일종의 반인반수(수半人半獸)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건축과 건설은 유사한 업종으로 보이지만 그 내막을 알고 보면 사업자등록증의 업종, 업태만 다른 것이 아니라 속까지 다른 DNA를 가지고 있다.
건설업은 한강의 기적이란 산업화 시대의 핵심 동력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에 못지않은 얼룩진 기억 또한 산재하고 있다.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1994년 성수대교가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2022년 광주 화정동 아파트 붕괴, 2023년 인천 검단 아파트 지하 주차장 구조물 붕괴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건설업의 고질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숙제이다.
헤파이스토스 시절 지어졌던 건축물이 수천 년을 지속하고 있음에 비하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아파트 현장 붕괴 사고는 사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대규모 현장의 실정이 이러한데 소규모 건축물 시장의 현실은 더욱 참담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건축 설계, 디자인 업종의 실정 역시 건설업 못지않은 고질적인 폐해가 적지 않다. 전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허가방이란 건축 설계 사무소와 건축 디자인이란 명분으로 행해지고 있는 소위 작가주의 건축가들의 행태는 아름다움을 상실한 채 방황하는 일그러진 아프로디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건축, 건설업계의 이러한 고질적인 문제점은 다양한 원인과 대안이 있을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모더니즘에서 파생된 헤파이스토스와 아프로디테의 사생아라는 점이다.
한마디로 파편화된 전문성과 체계성을 갖추진 못한 총체성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일반인들의 입장에선 설계와 시공은 아직도 한 이불 덮고 자는 잉꼬부부처럼 보일 수 있지만, 알고 보면 어쩔 수 없어 한 이불 덮고 자는지도 모르며, 철천지원수인 적과 동침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건축의 다중적인 모습은 왕권을 상징하는 스핑크스와 같은 반인반수도 있고, 매력적이고 신비한 개념으로 묘사되는 세이렌(Sirens)과 같은 반인반수도 있다. 또한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괴물로 묘사되는 켄타우로스(Centaurus)가 될 수도 있으며 수많은 영웅의 스승이 된 현자 케이론(Chiron)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숭고한 로고스를 통해 창조적 합리성을 지향하고 한 모더니즘은 그 목적과 달리 다중인격장애라는 희귀한 정신병을 가지고 있음이 밝혀졌다. 렘 콜하스 역시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도시인 뉴욕을 정신착란증적이라고 표현한 바가 있다.
유의할 점은 일련의 내용들이 모더니즘 자체를 부인하고자 함이 아니다. 디자인과 예술에 대한 구분과 해석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이다.
창의적, 개념적 표현과 아이디어의 중요성, 미학적 대상, 사람의 감성과 감각의 영역 및 기술의 범주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은 디자인과 예술의 공통점이다.
하지만 예술은 예술 자체, 예술가 개인의 표현이지만 디자인은 목적 중심이며 기술적, 사회적 시장 환경 속에서 특정 요구에 대한 가치를 목표로 한다.
또한 예술은 개인적 해석과 감정적 반응, 추상적 개념을 통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디자인은 특정 사용자의 요구, 유용성 및 효율성, 사회적 맥락과 공공성의 등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방법적 측면에서도 예술은 예술가 개인의 자의적 프로세스를 따르지만, 디자인은 솔루션이며, 최적화를 위한 제안 및 프로세스이며 협업적 프로세스가 중요한 대상이다.
디자인과 예술의 차이점 구분을 통해 다중인격장애와 같은 모더니즘의 오류를 극복할 수 있는 노력과 혁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건축은 예술의 대상이 아닌 디자인의 대상 임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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